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러운 전쟁 (문단 편집) === 민주화 이후 과거청산 === 군부정권의 몰락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집권(1983년 12월 10일~1989년 7월 8일)하자마자 [[호르헤 비델라]]와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의 군부 독재자들이 자행한 반인륜범죄 청산을 시도했다. 그는 이전에 군부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동사면법을 폐기하고[* 군부는 알폰신 대통령 당선자와 면담하여 그로부터 자동사면법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알폰신은 대통령 취임 후 3일만에 이 약속을 폐기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위원회를 설치해 더러운 전쟁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84년에 결과물로 발표된 보고서가 바로 '눈카 마스(Nunca Más)[* 영어로는 'Never Again', 한국어로 '결코 다시는'을 의미한다.]'였다. 약 50,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약 340곳의 비밀 지하감옥 등 수용시설의 위치와 실상이 자세히 적혀 있는 성과물이었으며 더러운 전쟁 동안 자행된 수많은 인권유린 사례들이 바로 이 '눈카 마스'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알폰신은 1986년 12월에 ‘60일 이내에 모든 군정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마무리한다’는 ‘기소종결법’을 내놨으며, 1987년 6월에는 중하급 장교들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기소대상에서 제외시켜주는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이 통과되었다. 이후 1989년에 들어선 [[카를로스 메넴]] 정권도 두 차례의 대규모 사면을 통해서 과거 인권유린의 책임이 있는 군인들과 그 뒤 과거청산 작업에 저항해 네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던 군인들을 풀어줌으로써 알폰신의 과거사 청산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여전히 군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과거 군정 책임자들, 중하급 장교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쿠데타 위협 앞에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옹호론도 있다. 이후 2003년 5월에 좌파인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과거 청산이 다시 시작되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기구가 다시 설치되어 지금까지(2015년) 5,400여 건의 인권유린 사례를 추가로 접수했으며, 재판 녹취록, 영상 자료, 언론 자료, 수만 명의 실종자와 가족들에 대한 DNA 뱅크에 이르기까지 150만 건의 자료를 모으고 디지털화하고 있다. 2013년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묻혀왔던 군대의 모든 비밀자료들을 공개하겠다는 국방장관의 발표도 있었다. 2005년 6월에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1986년의 기소종결법에 [[위헌]] 판결을 내림과 동시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5년 10월 연방검찰이 인권유린 가해자 295명을 한꺼번에 체포하는 등 약 460여 명 이상이 구속 및 수감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추가로 762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신청되어 재판에 넘겨져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자행되었던 악행들의 최고 책임자인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은 3번이나 법정 최고형인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결국 2012년 7월 5일에 이루어진 최종 재판에서 영아 납치 혐의가 인정되어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50년형을 선고받은 후 복역 중인 2013년 5월 17일에 감옥 독방에서 사망했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었던 [[라플라타 강]]변에 기억의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무자비한 고문이 행해졌던 해군공병학교에는 군정 역사박물관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version=163, paragraph=3, title2=아르헨티나/역사, version2=178, paragraph2=9.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